소우 (Sou) 오리엔탈 블레이드

대의를 품고 하늘을 벤 검은 새

소우는 서방 대륙 곳곳을 방랑하는 출신 불명의 검객입니다.  
다만, 먼지가 자욱한 잿빛 옷과 이국적 외모를 통해 동방에서 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주치는 사람들은 그를 '까마귀'라고 부르지만, 본인은 크게 개의치 않는 듯합니다. 
그가 어쩌다가 이역만리의 땅까지 오게 됐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과거 왕을 섬기던 호위무사였다던가, 그 왕을 시해했다는 출처 모를 소문만이 그를 따를 뿐입니다.

소우가 사용하는 각각 길이가 다른 두 자루의 검을 서방인들은 '오리엔탈 블레이드'라고 부릅니다. 
그 중 짧은 것은 '소태도'이며, 작고 가벼운 형태로 상대를 몰아붙이거나 방어에 활용합니다.   
반면에 길고 육중한 대태도는 강력한 일격으로 상대를 제압할 때 그 진가를 드러냅니다.  
소우는 전투의 상황에 맞춰 발도와 납도를 반복하며, 변화무쌍한 액션을 펼치는 매력적인 캐릭터 입니다.  

스크린샷
배경 스토리

달빛 아래로 끝없이 펼쳐진 검푸른 바다는 마치 무한한 우주를 연상시킨다.
수면 위로 넘실거리는 파도가 해안으로 밀려들어 부서지기를 반복한다.
이 거친 파도를 헤치며 배를 타고 꼬박 사나흘을 가야 보이는 자욱한 안개가 깔린 거대한 반도, 대륙으로 뻗는 통로는 거대한 산맥에 가로막혀 좀처럼 왕래가 없는 이 땅 '건곤국'에는 검은색의 머리카락과 황색 피부를 가진 배타적 민족이 터를 잡고 살아가고 있었다.
워낙 왕래가 적은 탓에 소문만 무성했지만 그중 가장 이목을 끄는 건 '신'이 직접 나라를 다스린다는, 좀처럼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백성들이 하늘과 땅 사이를 계단으로 연결하니, 하늘의 아들이 그 계단을 밟고 내려왔다.'

이 오래된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그리고 글로써 전해져 내려왔다.
이 땅의 권좌를 차지하기 위한 제후들의 전쟁은 일시에 멈췄으며, 천자의 계단을 밟고 내려온 신에게 모든 백성이 머리를 조아렸다.
신은 인간과는 달리 죽지 않으며 그저 하늘로 다시 오를 뿐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천자의 아들인 천손이 천자의 자리를 계승하기를 반복했다.
대를 이은 '신'의 통치 덕분일까, 수백 년간 건곤국은 번영했다.
하지만 작금에 이르러서는 상황이 그때와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천자는 총기를 잃었고, 여러 실정을 통해 백성들의 신망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 때문에 분노가 극에 달한 민중의 봉기가 들불처럼 번지고 있었으며, 그때마다 천자는 무자비하게 그들을 탄압했다.
어느덧 나라 안에는 크게 두 부류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신을 섬기는 자와 그에 대항하는 자.'

여느 때처럼 밤안개가 자욱한 새벽, 야트막한 언덕 위로 이 군도만의 독특한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웅장한 건물, '천궁'은 천자의 위엄을 뽐내듯 거대한 몸집으로 주위를 압도하고 있었다.
두터운 돌담이 끝없이 높이 쌓여있었고 그 너머로는 나무를 손으로 빚은 듯 유려한 곡선을 뽐내는 아치형 문과 창들이 눈에 띄었다.
횃불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첨탑들은 하늘을 찌를 듯 높게 솟아 있었으며 경계는 그 어느 때보다 삼엄했다.
달빛이 희뿌연 안개를 뚫고 침소 내부를 비췄다.
누군가의 숨죽인 발소리가 나무로 짜인 마루 위를 스치듯 지나가자, 예닐곱 명의 그림자가 침소로 미끄러지듯 스며들었다.
그들은 천자에 대항하자는 자들, 반란군 '밤까마귀'의 정예 자객들이었다.
자객들의 목표는 단 하나, 바로 천자의 목숨이었다.
침소의 한편에 자리한 옥좌에 앉아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천자는 태연자약하게 몸을 일으켰다.

"무지한 자들아. 난 죽지 않는 하늘의 아들이다."

기분 나쁠 정도로 얇고 카랑카랑한 남자의 음성에 자객들은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달빛에 드러난 천자의 모습은 기묘한 가면을 쓰고 있었고, 품이 커다란 옷으로 팔과 다리가 가리고 있어 뭔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느낌을 물씬 풍겼다.

"백성의 고혈을 빠는 악귀 녀석아, 그 더러운 주둥이로 감히 하늘을 운운하느냐! 네 녀석의 말대로 죽지 않는다면 이렇게 쥐새끼처럼 몸을 숨기진 않겠지!"

호기롭게 일갈하는 자객들은 일제히 허리춤에서 소태도를 뽑아 들어 천자를 향해 맹렬히 달려들었다.
천자는 여유롭게 몸을 비틀고는 그중 하나의 칼날을 손끝으로 부여잡아 가볍게 비틀자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소태도가 부러졌고 자객들 모두가 당황했다.
천자의 기형적으로 얇고 긴 손가락들은 마치 절지동물처럼 움직여 당황한 자객의 머리를 부여잡는다.

"아악!"

자객이 괴로운 절규를 내지름에도 자객의 머리 손으로 점점 파고드는 손끝은 도저히 인간의 완력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머리에 다섯 개의 구멍이 뚫린 자객의 몸은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축 늘어졌다.

"저…. 괴물 녀석!"

나머지 자객들은 공포와 분노에 휩싸여 연신 공격을 퍼부었지만 그들의 소태도는 허공을 가를 뿐, 천자의 몸에 작은 생채기 하나 남길 수 없었다.
유유히 그들의 공격을 피한 천자가 날카로운 손톱으로 자객들을 할퀴자 순간,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몸들이 두 동강 나듯 찢어져 버렸다.
주인을 잃은 몸뚱아리가 부르르 떨자, 쏟아져 내린 피는 나무로 짜인 바닥의 틈새를 타고 흘렀다.
그때야 자객들은 천자가 결코 자신들이 도모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는 정말 인외의 존재, '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침소를 뛰쳐나갔다.
그리고 침소에 덩그러니 남은 천자는 이미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찢어지는 웃음소리를 낼 뿐, 그들을 애써 쫓지 않았다.
천자의 침소에서의 한바탕 소란은 도처에 깔린 병력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어둠 속에서 천궁 구석구석 횃불이 이리저리 춤을 추며 경계가 한층 더 삼엄해졌지만, 자객들은 날쌔게 담을 넘고, 경비병들을 제거하며 탈출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저잣거리로 뻗는 통로, 어두컴컴한 그림자가 진 성문 아래에서 한 사내가 자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팔짱을 낀 채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그림자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림자를 벗어나 달빛에 모습을 드러낸 사내는 허리 춤에 짧은 소태도를, 등 뒤에 긴 대태도가 눈에 띄는 천궁의 호위무사였다.

"소우…."

자객 중 하나가 악명이 자자한 호위무사인 그 사내의 이름을 나지막이 내뱉었다.

"한참 동안 기다렸소. 자, 검을 드시오."

소우라 불린 사내는 숫자가 여럿인 자객들을 상대로 주눅 들지 않고 자세를 낮추고는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기세로 등에 동여 맨 대태도를 움켜쥐었다.
비록 그가 악명이 자자한 호위무사였지만 한낱 인간에 불과했기에 자객들 역시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나둘씩 소태도를 뽑아 들고는 기합과 함께 뛰어올랐다.
소우가 대태도를 발도하며 크게 휘두르자 날카로운 음색의 쇳소리와 함께 검광이 비쳤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던 자객들은 낙엽처럼 우수수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대태도를 칼집에 밀어 넣은 소우는 바닥에 쓰러진 적들을 보다가 문득 이상한 점을 찾아냈다.

'…하나가 비는군.'

흙바닥에 나뒹구는 시체들을 세어 보고는 한 명이 탈출했다는 걸 눈치챈 그때, 등 뒤로 발소리가 멀어지는 걸 들었다.
저잣거리의 골목으로 빨려 들어가는 자객의 그림자를 본 소우는 재빨리 추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자욱이 깔린 안개는 시야를 방해했고, 이내 방향 감각을 상실케 했다.
점점 흔적이 옅어지자 소우는 추격을 계속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는 발걸음을 돌려 골목을 나서려 했다.
그때, 서슬 퍼런 날붙이들이 소우를 포위하듯 덮쳐왔고, 겨우 피해낸 작은 공간에 제압당한 채로 굳어버렸다.

"암살은 실패했으나 대어를 낚았군. 자네가 그 악명이 자자한 호위무사, 소우인가?"

위엄있는 목소리가 어두운 골목 저편에서 들려왔다.
소우는 자신을 향해 번뜩이는 날붙이들이 목숨을 노린 것이 아닌 제압하는 용도라는 것을 눈치챘다.

"대어라 칭해주니 고맙소. 선생은 누구시오?"
"나는 밤까마귀의 수장, 신마라고 하네. 자네가 그토록 원하는 목의 주인이지."

밤까마귀는 갑작스레 등장한 신마라는 지도자와 함께 세를 키운 반란군으로, 천자의 가장 큰 위협이었다.
토벌하려 수차례 시도했지만 그림자조차 밟을 수 없었던 비밀스러운 조직의 수장이 바로 눈앞에 있던 셈이었다.
소우는 그런 신마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렇구려. 나를 곧바로 죽이지 않은 걸 보아하니 내게 원하는 게 있는 모양이오."
"후후, 바로 봤네."
"원하는 게 무엇이오?"
"나는 천자의 목을 원한다네. 어떤가? 약조만 한다면 자네를 살려주겠네."

신마의 대답은 소우의 예상에서 한 치의 어긋남이 없었기에 실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가로 저었다.

"사람을 잘못 봤소. 난 할 수 없소이다. 그냥 죽이시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신마의 입이 떨어졌다.

"왜지? 설마 자네도 천자가 진정 하늘의 아들이라 생각하나?"
"그건 아니오. 어질지 못하며 권력을 탐하고 약자를 핍박하는 것은 인간이 하는 짓이오."

신마는 소우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기에 그의 다음 말이 더욱 듣고 싶어졌다.

"그렇다면 더더욱 그를 위해 여기서 목숨을 버릴 필요가 없지 않은가?"
"불문곡직, 임무이기 때문이오. 난 그의 호위무사요."
"…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겠네. 어째서 죽음을 각오하면서까지 임무를 따지려 드는가? 여기서 승낙만 한다면 돌아가서 생각을 바꿔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터인데…."

이번에는 신마의 질문을 예상하지 못했다.
게다가 이 문답이 유언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에 소우는 한참을 뜸을 들이다가 짧게 답했다.

"그건 순리가 아니기 때문이오."

소우의 대답에 신마는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하!"

쩌렁쩌렁한 웃음소리가 골목에 울려 퍼졌다.
소우는 그런 그의 반응이 의아했는지 한참을 곰곰이 생각했지만 좀처럼 종잡을 수 없는 느낌이었다.

"……."
"순리라, 마음에 드는 인사로군. 그럼 또 보세."

그 말을 끝으로 신마는 부하들을 이끌고 자욱한 안개가 깔린 골목의 어둠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것이 소우와 신마, 두 사내의 짧지만 강렬한 첫 만남이었다.

시절은 속절없이 흘렀고, 여전히 건곤국은 천자가 다스리고 있었다.
천궁 너머 마을 주변의 들판과 강은 모두 하얀 눈으로 뒤덮였다.
하얀 모자를 쓴 듯한 가옥들의 지붕에선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서 몽글몽글한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정성껏 장작을 넣어가며 물의 온도를 맞추던 소우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나무 대야에 노모의 발을 담궈 정성껏 씻겨 주었다.
흡족한 미소로 아들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던 노모가 입을 열었다.

"…새장가를 들 생각은 없는 게야?"
"…."

노모의 물음에 소우는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나야 내일 죽어도 이상할 게 없을 나이가 됐다만, 홀로 남겨질 자식이 걱정이로구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미 홀로 산 세월이 10년입니다."
"…이제 그만 그 아이들은 놓아주거라…."
"……."

노모의 걱정이 담긴 핀잔에 소우는 말없이 엷은 미소를 띠웠다.
오래전, 대규모 농민 봉기가 일어나던 날, 혼란했던 저잣거리에서 허망하게 목숨을 잃은 아내와 어린 딸의 모습을 떠올렸다.
갑작스러운 사고였기에 유언도, 작별의 인사를 나눌 새도 없이 두 사람을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다.
소우는 미치도록 괴로운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당장이라도 두 사람 곁으로 떠나고 싶은 충동이 한가득이었지만, 차마 노모를 두고 그럴 수 없었기에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그렇게 산 세월이 어느덧 10년이 훌쩍 지났으니, 사별의 아픔은 굳은살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초저녁, 멎었던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하고 마을의 개 짖는 소리가 잦아들자 곧 어둠이 밀려들었다.
노모의 숨소리가 평온해지고 잠든 걸 확인하고 나서야 소우는 조심스레 방을 나섰다.
이미 한참 전부터 손님이 마당을 서성이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다.
얼마나 오래 기다렸던지 손님의 어깨에는 눈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뉘시오?"
"이제야 나오는군. 혹시 날 기억하겠는가?"

또렷이 기억나는 그날의 위엄 가득한 목소리, 밤까마귀의 수장인 신마라는 걸 대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후…. 내가 어찌 잊겠소."
"하하하, 다행이로군. 이렇게 서서 말하기도 곤란하니 잠시 실례하겠네. 자네 방은 이쪽인가?"

소우가 말릴 새도 없이 능청스레 어깨 위의 눈을 털며 신마가 방 안으로 들어갔다.
도저히 어마어마한 현상금이 걸린 사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대범한 모습에 소우는 잠시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조용히 따라 들어갔다.

"예전에 그 일 때문에 날 찾아온 거라면 명백한 실수요. 이미 말했듯 난 천자의 무사요. 지금 이 자리에서 당신의 목을 벨 수도 있소."
"그러지 않을 거지 않나? 순리를 말하는 자네라면 말이야."
"……."
"따뜻한 술 한잔 내어주게. 날이 궂어서 그런가, 오장육부가 얼어붙는 느낌이네."

신마의 넉살에 소우는 못 이긴 듯 난로에 주전자를 데워 잔을 채웠다.
두 사람이 호로록거리며 술의 향을 음미하는 소리가 어두운 방 안의 정적을 깼다.

"좋은 술이로군. 향이 아주 일품일세."
"이제 본론을 듣고 싶소."
"자네, 성미가 급하군. 알겠네. 그럼, 본론을 말함세."
"……."
"천자를 죽여주게."

아무렇지 않게 천자의 암살을 입에 올리는 신마의 말에 소우는 술잔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푹 쉬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오? 그렇게 원하는 선생, 본인이나 추종자들이 하면 되지 않겠소?"
"시도라면 충분히 해보았네. 그리고 우린 깨달았네. 일반적인 방법으론 할 수 없는 일이란 것을. 그렇기에 이 대업을 맡아줄 적임자를 찾아 나선 것일세."

그 말을 하는 신마의 표정이 사뭇 진중하게 바뀌었다.

"대업이라 말하지만, 그저 당신들을 위해 희생할 다른 누군가를 찾는 것 같구려. 구차한 변경이라고 생각하지 않소?"

소우의 의표를 찌르는 반문에 신마는 턱을 만지면서 잠시 고민하다 대답을 이어갔다.

"흠, 그리 볼 수도 있겠군. 아주 틀린 말은 아니야. 그러나 반드시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일이네. 천자가 존재하는 한, 이 땅의 백성들은 끊임없이 생명을 위협받게 될 것일세 그렇기에 대업이라 말하지."
"…모든 인간은 목숨이 하나요."
"목숨은 누구에게나 중한 것이네. 나 역시 결코 가벼이 여기지 않네. 하지만 이 땅 위의 모든 목숨이 동일한 가치라고 생각하는가? 누군가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희생당하는 목숨이 너무도 많다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는가?"
"사람이라면 응당 누구나 한번은 죽소. 그중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지만, 어떤 죽음은 깃털보다 가볍소. 이는 목숨을 사용하는 방향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오."

소우의 막힘없는 대답에 신마는 잠시 말문을 잃었다.
소우가 신마의 빈 술잔에 가득 채워주자, 신마는 따뜻한 술을 음미하고는 질문을 이어갔다.

"문득 자네는 어느 쪽인지 궁금하군."
"…그 질문에는 답할 수 없소. 난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오."

소우는 잠시 망설이다가 답변을 거절하자, 신마가 되물었다.

"노모의 봉양 때문인가?"
"……."

대답하기 곤란했는지 소우는 아무런 답을 하지 않은 채 신마를 응시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자, 신마는 술잔에 남긴 나머지 술을 호로록 마시고는 자리를 일어났다.

"참으로 훌륭한 술이었네. 몸이 충분히 녹은 것 같으니 이만 가보겠네."

그렇게 인사말을 남기고 조용히 방을 나섰고 소우는 손님이 떠난 자리를 한참 동안 응시했다.
그와는 짧은 두 번의 만남이었지만, 분명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를 위해 목숨을 내던지는 자들이 우후죽순 생겨난 것이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

또다시 몇 번의 계절이 흘렀다.
거듭되는 봉기와 암살 시도로 천자의 신경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로웠으며, 의심 가는 자들은 모조리 숙청하고 마을을 불태워 몰살시키는 등 악행은 점점 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소우는 이런 천자의 행동이 옳다고 여기지 않았다.
게다가 처음부터 천자가 신이라고 생각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는 천자의 호위무사였다.
천자를 지키는 것은 본인이 선택한 직업윤리이며 사명이었기에, 마치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순서처럼 지극히 당연한 순리였다.
천궁의 호위가 한층 강화되자, 소우는 좀처럼 노모를 신경 쓸 여력이 없어졌다.
한사코 자신은 괜찮다며 어서 가라는 노모의 손짓이 두고두고 눈에 밟혔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오늘은 아주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발길을 재촉해봤지만 유난히 가는 길이 멀게만 느껴졌다.
이윽고 저택에 다다르자,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노모의 웃음소리가 대문 너머로 들려왔기 때문이다.

"……."

소우가 문을 열자, 노모는 신마의 등에 업힌 채로 해맑게 웃고 있었다.

"제가 뭐라 했습니까? 어머니? 저 친구, 금방 올 거라고 했죠?"
"……."

신마의 능청스러운 연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노모는 신마의 등에서 내려와 오랜만에 만난 아들 소우를 안아주었다.
소우는 그간 불안했을 노모의 등을 어루만져 위로하면서도 시선은 신마에게서 떼지 못했다.

"선생이 어찌 이곳에 있는 거요?"
"자네가 오랫동안 집을 비우니 노모께서 적적하실 것 같아 와 있던 참이네. 아, 내 정신 좀 보게. 저녁을 준비 중이었는데 깜빡했군."

신마는 너스레를 떨며 마당 한편에서 끓고 있는 가마솥에 장작을 댔다.
그가 커다란 가마솥의 뚜껑을 열자, 고깃국 냄새가 마당에 퍼졌다.
저 귀한 고기가 어디서 났을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소우는 할 말을 잃은 채 신마를 바라봤다.
신마라는 사내가 분명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지만, 이 정도일 줄이라고는 상상치 못했다.
소우는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의도치 않게 신세를 졌구려. 고맙소."
"마음에 담아두지 말게. 모름지기 인간은 모두 누군가의 자식 아닌가? 하하. 안 그런가요? 어머니? "

신마가 멋쩍게 웃으며 노모의 손을 잡아 흔들자, 노모는 즐거운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난 이만 가보겠네. 간만에 모친과 오붓한 식사를 방해할 수 없지."

신마가 인사 후 가려고 하자 소우와 노모가 만류했지만,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한사코 거절했다.
그러고는 앞으로도 자주 인사드리겠다며 노모를 안심시키고는 홀연히 떠났다.
약속대로 그 뒤로도 신마는 저택에 종종 찾아와서는 노모와 시간을 보낸다든지, 사냥한 짐승의 고기나 쌀가마니 등을 두고 갔고, 자주 자리를 비워야 하는 소우를 대신해 정성껏 노모를 봉양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노모는 그저 신마가 소우의 친한 벗이라고 생각할 뿐, 그의 호의를 눈을 감는 순간까지 절대 의심하지 않았다.

이듬해 봄, 노모는 평온한 모습으로 잠든 채 소우의 곁을 떠났다.
장례는 조촐하지만 예를 갖춰 치렀으며, 여전히 신마가 곁을 지켰다.
언젠가 이런 때가 오리란 걸 알았기 때문일까, 소우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반면, 신마는 마치 자신이 친아들인 양 목 놓아 꺼이꺼이 울었댔다.

"…그간 자네 모친과도 정이 많이 들었나 싶네. 추태를 용서하게나."
"……."

노모의 무덤은 아내와 딸이 묻힌 바로 옆자리였다.
풀이 무성히 자란 두 개의 무덤 옆에 새롭게 흙을 쌓아 올린 무덤이 자리했다.
무덤가에는 봄마다 찾아오는 손님처럼 금낭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금낭화의 꽃망울을 만지작거리던 신마가 소우를 바라보며 넌지시 물었다.

"금낭화가 참 멋들어지게 피었군. 자네, 이 꽃의 의미를 아는가?"

소우는 금낭화의 의미를 알고 있었기에 질문 그 자체보다는 신마의 의중에 더 집중했다.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거요?"
"그렇다네."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꽉 다문 신마의 얼굴을 확인한 소우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당신을 따르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꽃이오."
"그래, 무인에게 무척이나 어울리는 꽃이로군. 그러고 보면 자네는 어울리지 않게 박학다식하단 말이지."

두 사내의 화제는 자연스럽게 천자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갔다.

"하나 묻겠소, 왜 천자를 죽이려고 하오?"
"그야 대의이기 때문이지."
소우는 어쩌면 이미 대답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무릇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서라면 대의가 필요하기에.
그것은 늘 다수의 행복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소수의 희생에 대해선 당연시하는 인식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소우는 그런 대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의라…. 당신은 대의가 완전무결하다 생각하시오?"
"대의가 그러다는 것은 다수가 불행 속에 살고 있다는 의미일세. 천자 하나로 인해 다수가 불행해지는 것. 그건 순리가 아닐세. 그걸 바로잡기 위한 대의이지."
"…난 당신네와 같은 선동가들을 좋아하지 않소. 겉만 번지르르한 말들로 대중들을 현혹하고, 현혹된 대중들을 광기로써 무고한 희생을 자초하니 말이오. 내게 가장 큰 적은 대의의 탈을 쓴 불의요."

소우는 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이 말을 할 때만큼은 어렵게 억누르고 있는 슬픔과 분노가 느껴졌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를 물어도 되겠나?"

신마의 물음에 소우는 뒤를 돌아 무덤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이 무덤들의 주인은 내 아내와 딸이오. 10여 년 전, 민중 대 봉기가 일었을 때 성난 군중들의 틈에 끼어 이유도 모른 채 비명횡사했소."
"……."

소우의 말에 신마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자신들의 대의가 무고한 희생을 낳게 될 거란 걸 몰랐을 거요. 그들은 무지몽매한 백성에 불과하니 말이오. 그러나 그것을 지시한 자들은 알고 있었을 것이오. 그렇지 않소?"
"…자네의 가족 일은 유감일세. 나 역시 대의를 소수의 희생이 당연하다고 여기진 않네. 그럼에도 투쟁을 멈출 수는 없는 것은 이 불행을 이어가선 아니 되기 때문이네."
"그대의 치세에는 모두가 행복할 거라 단언하시오?"
"… 난 권좌에 앉을 생각이 추호도 없네.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 그게 나의 대의일세. 내 역할은 딱 거기까지야. 불의의 근본을 제거한 뒤 새로운 정의는 이 땅에 살아가는 자들의 몫이네."

신마의 대답은 소우의 예상과는 너무도 달랐다.
그리고 그것이 한낱 이상론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정녕 그리 생각한다면 당신이 내세우는 정의는 측은지심에 지나지 않소."
"자네 말대로라면 정의가 무엇인가?"

신마의 의표를 찌르는 질문에 소우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겠소. 어쩌면 답을 내지 못했기에 변화가 두려운 것일지도…."

신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하네. 나 역시 그랬으니 말일세. 이건 다른 이야기일 수도 있네만, 자네는 천자가 어찌 그 괴물 같은 힘을 갖게 된 거라 생각하나? 한낱 인간이 신이라 불릴 만큼 강해지는 게 가당키나 한가?"
"……그 역시 생각해 본 바가 없소."
"이건 왕가에 대대로 내려오는 비밀일세. 바로 피를 머금은 독초 때문이지. 그 독초를 통해 인 외의 존재로 거듭날 수 있지. 물론 적정량이라면 그저 육체를 단련하는 용도겠지만 작금의 천자는 아닐세. 독초로 인해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고, 손발이 흉측하게 길어졌다네. 그로 인해 천자는 어느 날부터 가면을 썼고, 몸에 맞지도 않는 옷을 입게 됐지."

왕가의 비밀이라고 했지만, 그가 말하는 것들은 모두 정황상 증거들이 차고 넘치는 이야기들이었다.
하지만 이런 왕가의 비밀들을 어찌 반란군의 수장이 알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왕가의 비밀을 어찌 당신이 사사로이 알고 있는 거요? 단순 조사만으로 밝혀냈다기엔 석연치 않은 부분투성이구려."

"한때 왕가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네. 어릴 적 나는 '천손'이라고 불렸지."

천손이란 건곤국에서 '천자의 아들'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아들 중에서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천자의 자리에 오를 적장자를 의미했다.
사라진 천손에 대한 이야기는 천궁 내에 오래된 소문이 중 하나였다.
소우 역시 들어보긴 했지만 진실일 거라는 생각을, 아니 크게 관심을 두진 않았다.
신마는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갔다.

"천손이었던 내겐 아우가 있었네. 우리는 세상에 둘도 없는 우애 좋은 형제였지. 그러나 천자의 자리는 오직 하나. 아우는 그 자리에 몹시도 앉고 싶었고 나는 추호도 욕심이 나지 않았다네. 결국 나는 모든 걸 포기하고 천궁을 떠났고 얼마 후 아우는 천자가 되었네. "
"선생의 말대로라면 그 아우가 지금의 천자라는 말이오?"
"그렇다네."
"……."
"성군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던 아우는 천자가 된 후 변해버렸지. 하지만 이건 내 손을 떠난 일이라고 생각했네. 난 더 이상 천손도, 그 무엇도 아니었으니 말일세. 그렇게 방관하는 사이 상황은 더욱 나빠졌네. 어느 날, 정신을 차린 나는 듣게 됐네. 백성들의 한 맺힌 절규를…. 난 죽는 순간까지 이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지. 변화는 스스로 오지 않네. 누군가가 나서야만 하네. 그렇게 그 누군가들이 모여서 지금의 대의가 된 것일세."

소우는 문득 천자가 신마의 정체에 대해 알고 있을지 궁금했다.

"… 천자도 당신의 정체를 알고 있소?"
"이미 알고 있는 눈치일세. 따로 공표하진 않았네만은 이 사실이 수면 위로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는 것 같네. 그러길 바라진 않는 건 나 역시 마찬가지인 상황이고. 내 입으로 밝힌다고 한들 믿는 사람도 없을 것이네."
"믿기 어려운 이야기라는 건 사실이오. 반란군의 수괴가 천손이라니…."

신마는 품속에서 호신용 단검, 협차를 꺼내어 소우에게 내밀어 보였다.
엉터리 가죽 칼집에 꽂혀있었지만, 협차의 손잡이 화려한 장식으로 미루어 짐작컨데 결코 예사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협차의 중앙에 끊어져 있는 문장을 보는 순간 소우는 확신했다.

"이건…. 왕가의 문장이구려."
"천궁을 빠져나올 때 호신용으로 들고 나온 물건이라네. 어린 내게 적당한 물건이었거든."
"…선생 역시 기구한 운명이구려. "
"누군가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은 건 자네가 처음일세. 그 협차는 자네가 갖게. 내 선물일세."
"그럴 수는 없소. 이건 왕가의 물건이오. 선생의 신분을 증명하는 유일한 증좌인데 이걸 어찌 내게 준다는 말이오?"
"말했다시피, 난 신분을 누군가에게 증명할 생각은 없네."
"……."

소우가 협차의 가죽 칼집을 살짝 밑으로 내리자, 그 틈새로 보이는 매끈하게 벼려진 칼날이 햇빛을 튕겨내며 영롱한 자태를 뽐냈다.

"이제껏 난 선생의 호의에 응답한 적이 없었소. 어찌 내게 자꾸 호의를 베푸시오. 지금도 내가 천자의 목을 가져다줄 거라 확신하시오?"
"그렇다네. 당장은 아닐지 몰라도 난 자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할 것이네. 그것이 나의 지난 씻을 수 없는 과오를 만회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세."
"……."

소우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며 미소를 띠며 협차를 품속에 넣었다.

"문득 궁금하구려. 어찌하여 그때 나를 죽이지 않은 거요?"

신마는 소우의 질문에 고개를 갸웃했다.

"질문이 이상하군. 왜 자네를 선택한 거냐고 물어야 맞지 않나?"
"……."
"난 실력과 인품을 갖춘, 나와 뜻이 일치하는 이를 찾고 있었네. 그리고 그때 자네와의 첫 대면에서 그걸 확신했지."

소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여전히 거창한 대의 따윈 모르는 사람이오."

신마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직은 눈앞의 사내를 설득하기엔 시기상조였다라고 자책할 무렵, 소우는 두 손으로 검을 쥔 채 예를 갖췄다.

"허나 모름지기 사내란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고 했소. 선생이 내게 보내준 신의에 보답하고 싶소."
"자네…."

신마는 감격에 젖은 표정으로 소우에게 화답하듯 예를 갖췄다.
따스한 봄날의 바람이 금낭화의 꽃망울을 연신 흔들어 댔다.

그날 이후, 두 사내는 물과 물고기처럼 어울렸다.
늘 서로를 가까이 두고 낮에는 낚시를 즐기면서 시간을 보내거나 해가 지면 좋은 술을 나누며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휘엉청 밝은 달이 빈 뜰을 다소곳이 비추는 어느 밤, 신마가 술잔을 내려놓고는 달을 보고는 추억에 잠긴 눈으로 말을 꺼냈다.

"사실 내게도 딸이 있었다네."
"…있었다는 건 지금은 없다는 것이구려."
"맞네. 십 수 년전, 아주 먼 곳으로 떠나보냈지."
"……."
"오늘처럼 달빛이 찬란한 밤이었네. 그날은 인생에서 지우려야 지울 수 없는 날이 되어 버렸네. 잠든 아이의 손엔 협차의 칼집이 꼭 쥐어져 있었다네. 차마 그걸 손에서 떼어낼 수가 없었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협차의 칼은 내가 가져왔네만 칼집은 여전히 그 아이가 갖고 있을 걸세. 자라는 동안, 아비를 원망깨나 했을 테지."

소우는 늘 자신감 넘치던 사내의 후회와 자조 섞인 모습이 익숙지 않았다.

"어찌하여 떠나보낸 거요?"
"그 아이는 백로 같았지. 우리 같은 까마귀들 사이에 두기엔 눈에 너무 띄었거든."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떤 사정이었는지,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었지만 소우는 그 이상으로 파고들지 않았다.
그 어떤 위로도 도움이 안 될 것을 알았으며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신마 본인이 했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나무를 숨기고 싶다면 숲에 숨겨야 하오. 충분히 이치에 맞소."

신마는 소우의 그런 아리송한 표현이 적잖게 마음에 들었는지 한바탕 크게 웃고 나서 겨우 말을 이어 나갔다.

"무슨 위로가 그런가? 하기야 자네는 늘 그런 식이지. 가만 보면 참 특이하단 말이지."
"… 난 내가 헤아릴 수 있는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뿐이오. 그 외의 것은 잘 모르겠구려."

그 대답에도 신마는 한바탕 웃어 보이고는 술잔에 남은 술을 비워냈다.
그렇게 한참 소소한 대화를 주고받던 두 사내는 밤이 깊어서야 대업을 위한 논의를 시작했다.

"시일은 기존 날짜보다 앞당기는 것이 좋겠네. 요 며칠 사이 천자가 몇몇 고을에 불을 놓고 있네. 아마도 내가 죽기 전까진 저 미친 짓을 멈추지 않을 테지. 허나 이건 전초전에 불과하다는 게 내 생각일세. 최근 입수한 첩보에 의하면 다량의 화약이 천궁으로 모아지고 있네. 이것이 백성들에게 쓰여진다면 지금까지 없었던 대재앙이 펼쳐질 것일세."
"… 난 언제든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소."
"하지만 자네라 한들 천자가 내린 '백보령'을 어길 수는 없지 않겠는가?"

백보령이란 천자의 곁에 그 누구도 백 보 이내로 다가설 수 없도록 한 명령을 이르는 말이었다.
천궁 내에서 그를 섬기는 시종이나 호위무사조차 함부로 다가설 수 없었기에, 그에게 다가서기도 전에 죽게 될 것이 불 보듯 뻔한 결과였다.
하지만 소우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내 이미 목숨을 바쳐 천자를 벨 것이라 약조했소. 안위를 따져 묻을 일이 아니오. 다소 무모하다 한들, 천자의 방비에 틈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선생이 바라 마지않는 대업을 완수할 수 있소."
"… 목숨을 걸고 하는 일에 실패란 있을 수 없네. 만전을 기해야만 성공할 수 있네. 내가 고민 중인 묘안이 있네."
"묘안이라…. 대체 무엇이오?"

소우의 물음에 신마는 멋쩍게 웃어 보이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아직은 준비가 미흡한 단계라 말하기 쑥스럽군. 좀 더 구체적으로 정리가 되면 자네에게 말해주겠네."
"알겠소."

신마는 그 말을 뒤로한 채, 장고의 시간에 들어갔다.
거의 하루도 빠짐이 없이 자신과 의논을 하던 신마였기에 소우는 다소 의아했지만, 그의 뜻 역시 존중했기에 함부로 거스르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어느새 여드레가 흘렀다.
석양이 저물고 짙은 어둠이 깔리자,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한 비는 적막한 세상을 흠뻑 적셨다.
먼발치에서 들려오는 젖은 땅에 닿는 발소리에 온 신경을 쓰던 차, 밤까마귀의 자객이 소우에게 한 통의 서신과 함께 겹겹이 비단으로 쌓인 나무 상자를 건넸다.

"무엇이오?"
"신마 님께서 보낸 물건입니다. '묘안'이라고 전하면 아실 거라 말씀하셨습니다."
"……."

자객을 돌려보낸 후 방 안으로 들어온 소우는 겹겹이 쌓여있는 비단의 매듭을 풀었다.
나무 상자의 뚜껑을 열고는 안에 담긴 물건을 보고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뚜껑을 닫아 상자를 봉한 소우는 동봉된 서신을 펼쳐 등불에 비췄다.
그것은 분명 신마의 서체였다.
한 글자, 한 글자, 꼼꼼히 살핀 후 서신을 접어 고이 접어 옷섶 사이로 감췄다.

"대의…."

소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낮게 읊조렸다.
그리고는 탁자 위에 술잔을 입에 가져가 댄 뒤, 깊은 생각에 잠겼다.
깊은 밤이 지나 빗소리가 잠잠해지고, 동이 트는 아침 무렵이 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난 소우는 신마에게 넘겨받은 물건을 들고 집을 나섰다.

-

군청색의 밤하늘을 형상화한 천자의 계단.
계단의 최상부에는 가면을 쓴 채 용상에 앉아 있는 천자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고, 겹겹이 계단을 둘러싼 수많은 병력과 도열한 시종들 사이로 소우가 당당히 걸어갔다.
소우가 시종들의 옆을 지날 때마다 하얗게 분칠하고 붉게 입술을 칠한 시종들이 반복해서 외쳐댔다.

"호위무사여, 계단을 오르라. 호위무사여 계단을 오르라."

얇고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를 뒤로한 채, 소우는 계단 앞에 섰다.
시종 중 하나가 다가와 두 손을 내밀었고, 소우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소지하고 있던 무기를 건넸다.

"호위무사여, 계단을 오르라."

마침내, 천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소우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한참을 올라, 천자와 지척의 거리에 멈춰 섰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천자는 한눈에 봐도 몹시 들떠 있었다.

"미천한 종, 소우. 인사 올립니다."

소우가 무릎을 끓고 예를 갖추자, 천자가 손을 들어 소매 속에 감춰져 있던 얇고 긴 손가락으로 상자를 가르켰다.

"그 상자인가?"
"네."
"어서 꺼내어 보여다오."
"……."

소우가 비단을 풀어 상자를 열어 천자에게 보여주자, 천자는 보고도 믿기질 않는지 가까이 다가와서 한참을 살폈다.
그리고는 참을 수 없는 기쁨을 만끽하며 웃어 보였다.

"후후, 틀림이 없구나. 오래전 약조한 대로 왕가의 보물, 음양검을 하사하겠노라. 귀공은 이 검에 걸맞은 대우를 기대해도 좋다."

천자가 두꺼운 천으로 덮인 두 자루의 검, 음양검을 가지런히 소우의 앞에 내려놨다.
오래전, 이 땅의 백성들이 '최초의 천자'에게 바쳤다고 전해지는 왕가의 보물을 하사받는 순간이었다.

"… 응당 해야할 일을 했을 뿐인데 이리 큰 영광을 주시다니…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소우는 무릎을 끓은 채, 머리를 조아렸다.
천자는 얇고 긴 손가락으로 상자 안에 들어있는 물건을 꺼내, 계단 밑의 시종들과 병사들을 향해 뻗어 보였다.

"모두 똑똑히 보아라. 이것이 하늘을 우롱하고, 신을 위협한 밤까마귀의 최후이다."

천자가 쥐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누군가의 수급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이들은 하나같이 환호했지만, 내심 공포에 질려 있었다.
더 이상 눈앞의 괴물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없다는 공포와 함께 실낱같은 희망조차 허락되지 않는 세상이 그려졌다.
그렇다, 그들이 목격한 것은 바로 반란군의 수장, '신마'의 수급이었다.
천자가 기쁨에 젖어 어깨를 들썩거리며 찢어지는 웃음소리를 내자 고요한 공간이 날카로운 소리로 가득 채워졌다.
그때, 천자의 뒤편에서 청명한 금속음과 함께 어두컴컴한 천자의 계단 위로 은빛 궤적이 그려졌다.
아주 짧은 찰나의 순간, 천자는 고개를 돌려 소우와 눈이 마주쳤다.
좀 전까지 전혀 생기가 없었던 소우의 눈빛은 무언가를 노리는 맹수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툭-.'

모두가 숨죽여 지켜보는 광경, 그 누구도 말을 잇지 못했고 고요한 공간에 무언가가 힘없이 떨어지는 소리가 울러 퍼졌다.

'털썩-.'

천자의 목이 떨어지고 한참을 버티던 몸이 서서히 균형을 잃고 스르르 넘어갔다.
소우에게는 신마와 나눴던 대화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났고, 그 짧은 순간이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그리고 정신이 들었을 때, 계단 밑의 사람들이 어쩔 바를 몰라 하며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소우는 허리를 숙여, 천자의 머리를 들어 올려 계단 밑의 사람들에게 내밀어 보였다.

"보아라."

소우의 근엄한 목소리에 일순간, 천궁이 정숙해졌다.

"그대들이 하늘처럼 섬기던 신은 사실 한낱 인간이다."

모두의 앞에서 그들이 섬기는 신을 부정했다.
이는 모두가 알면서도 차마 입 밖으로는 꺼내지 못했던 말이었다.
소우는 계속해서 연설을 이어갔다.

"그는 함부로 혹세무민하여 불멸의 권세를 탐했으며, 가혹한 정치로 천하만민을 고통케 하여 순리를 저버렸다. 이에 응당한 심판을 내렸다."

이윽고, 오랫동안 스스로 답을 내리지 못했던 결론을 지어 보였다.

"이것이 바로 대의이자…. 천의다."

소우는 천천히 손에 힘을 풀어 들고 있던 천자의 목을 계단 밑으로 굴려 떨어뜨렸다.
계단을 타고 불규칙하게 굴러가던 천자의 머리가 지상에 닿자, 그 모습을 보던 모두가 대오를 잊은 채, 좌우로 비켜섰고 널찍한 길이 생겨났다.
아마도 그것은 신이 죽었다는 공포이거나, 신을 죽인 자에 대한 경외일 것이다.
소우는 터덜터덜 천자의 계단에서 내려와 그 인파 사이로 생겨난 길을 걸었다.

"……."

누구도 소우를 제지할 수 없었던 그때, 경비 대장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천자를 시해한 자다! 저 호위무사를 체포하라!"

그제야 하나 같이 정신을 차린 수많은 병력이 병장기를 쥔 채, 겹겹이 소우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럼에도 소우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앞만 보고 걸을 뿐이었다.
쾅!
굳게 닫혀있던 천궁의 문이 거칠게 열리고, 제각기 병장기를 든 성난 백성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은 저마다의 사무친 원한에 휩싸여 고함을 지르고 있었지만, 소우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날, 천궁의 지붕에는 천자의 죽음을 알리는 깃발과 나라의 주인이 바뀌었음을 알리는 깃발이 동시에 나부꼈다.
이 소문은 삽시간 내에 나라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천자가 귀천했다는구먼!"
"귀천은 무슨! 목이 잘려 죽었다던디?"
"신이 목이 잘렸다니, 그게 가당키나 한가?"
"그런데 대체 누가…?"
"…나야 모르지."

입소문은 점점 커져서, 어디부터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를 판명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노한 하늘께서 무사를 보내어 가짜 천자를 죽였다!"
"그럼 그분이 직접 이 나라를 다스리면 좋으련만…."

소우의 이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이름 모를 무사의 이야기는 백성들의 입에 꾸준히 오르내렸다.
때로는 공포의 존재로, 때로는 칭송의 존재로…

깊은 밤, 모처럼 맑게 갠 밤하늘엔 달과 별이 빛나고 하늘을 향해 검게 뻗은 나무들의 그림자가 운치를 더했다.
굽이굽이 능선은 달빛을 따라 길게 이어져 장관을 연출했고, 바람에 조금씩 흔들리는 나무들의 잎사귀들은 마치 풍류라도 아는 듯 곡조를 뽑아냈다.
산속의 밤이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으로 젖어 들 무렵, 타오르는 모닥불 소리와 하늘로 몽글몽글 피어나는 연기가 이 적막한 장소에 인간이 있음을 짐작게 했다.
소우는 조용히 품속에서 신마의 마지막 서신을 꺼내어 펼쳤다.
이미 읽었던 내용이지만, 먼저 떠나간 벗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편지를 읽으니 고독했던 산속의 생활에 그나마 위안이 되는 듯했다.

'자네가 놀라는 모습을 내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게 매우 유감이군.
아니, 오히려 그 무덤덤한 모습을 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사실 요며칠을 혼자서 고민했네.
자네와 의논했다면 내 결심이 흔들릴 것 같아 차마 그러질 못했네.
… 미안하네.

고민하던 차에 문득 자네가 했던 말이 떠오르더군.
무릇 사내란 자기를 알아주는 이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말이.
내가 자네를 알아줬다며 신의에 보답하겠노라 했지만, 사실 그건 내가 하고픈 말이었네.

난 자네를 믿고 있네.
분명 자네라면 어렵사리 만들어 낸 기회를 살릴 것이라는 걸.
그렇기에 홀가분하게 결론에 이를 수 있었네.

… 물론, 홀가분하다는 것은 거짓말일세.
자네가 모친 일로 힘들어하던 것처럼 나 역시,
멀리 떠나보낸 딸아이의 행방이 못내 가슴 속에 한으로 남는다네.

하지만 더는 주저할 수 없네.
이 땅 위의 가장 큰 불행은 나의 과오로 비롯된 일이며, 망설이고 외면했기에 눈덩이처럼 커져 버렸네.
이제는 누군가가 멈춰야만 하네.

이것은 대의이며, 천의일세.

- 자네의 벗, 신마.'

소우는 서신을 고이 접어 모닥불에 가까이 대자, 끄트머리부터 타오르며 재가 되어 춤을 추듯 날아갔다.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소우가 친우를 향해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약조대로 대업을 완수했소. 편히 쉬시오."

다시 수년의 세월이 흘렀다.
서방 대륙의 동쪽, 이름 모를 작은 마을의 풍경은 목가적 분위기를 물씬 내고 있었다.
석양이 지는 푸른 들판 위로는 양들이 풀을 뜯고 있었고, 마을로 쭉 이어진 길을 따라 이름 모를 꽃들이 살랑살랑 고개를 흔든다.
마을에 하나뿐인 주점의 나무 간판은 흔들다가 멈추기를 반복하자 주점의 주인은 행여라도 지지대가 부러질까 노심초사였다.
그때, 문이 삐끄덕 소리를 내며 열렸다.
방랑자는 먼지가 자욱한 넝마가 된 잿빛 옷자락을 무심코 몇 번 털어내고는 익숙하게 바 건너편에 앉았다.

"주인장, 술을 좀 내주시겠소?"
"음? 당신 동방 사람인가요? 정말 멋진 검이군요. 그러고보니 최근 동방 사람을 자주 보는 것 같습니다."

주인은 친절하게 낡은 손수건을 내밀었고 동방인 방랑자는 그 손수건으로 얼굴에 맺힌 땀방울을 훔쳐냈다.
곧이어, 나무로 된 컵에 가득 담긴 밀주가 담겨 나오자 한 모금 들이켜고는 답례 인사를 건넸다.

"고맙소."
"어디서 왔습니까? 서쪽? 남쪽? 설마 사막을 건너온 겁니까?"
"좀 쉬고 싶은데 빈방이 있소?"
"흐음, 어디 보자…."

주점의 주인은 안경을 고쳐 쓰고는 눈가를 찡그리며 장부를 살피다가 뭔가를 찾았는지 밝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마침 방 하나가 비었습니다. 오전에 동방인 소녀가 묵었던 방이지요. 우연히도 또다시 동방인이 묵게 됐네요. 하하."

그렇게 말하며 안내해 준 방은 작고 허름했지만, 피로를 달래고 하룻밤 묵기에는 손색이 없었다.
방랑자는 짐을 풀다가 무심코 침대와 벽의 틈에서 빛나는 무언가를 발견하곤 손을 뻗어 꺼냈다.
분명 어딘가 낯이 익은 문양의 짧은 칼집이었다.

"이건…."
"음? 칼집? 아, 그 동방인 소녀가 흘리고 간 건 아닐까요?"

방랑자는 무언가 생각이라도 난 듯 가방 속을 뒤져 잊고 있던 물건을 꺼냈다.
옛 벗에게서 받았던 협차를 꺼내어 가죽으로 만든 조악한 칼집을 뽑아 방금 찾아낸 칼집에 천천히 밀어 넣었다.
크기도 딱 들어맞았을뿐더러 중간에 끊어져버렸던 까마귀 문양이 하나로 이어졌다.
누가 봐도 이것이 한 쌍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허어…. 이런 우연이… 혹시 그 아가씨를 아는 겁니까?"
"…. 어쩌면 말이오."

방랑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가에 미소를 보였다.
주인에게서 이른 아침에 떠났다고 하는 동방인 소녀에 대해 몇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마족과 전쟁 중인 요새 도시라… "

소녀의 행선지라던가, 그 근방의 소식들은 오랫동안 방랑해 온 사내에게는 꽤 흥미로운 이야기들이었다.
다음날, 화창한 햇살을 맞는 주점의 문을 열고 방랑자는 다시 길을 나섰다.
한참을 걷던 방랑자는 그 자리에 멈춰 선다.
그러고는 하늘을 보며 오래전 떠난, 옛 벗의 얼굴을 떠올렸다.

'… 어쩌면 내가 보답할 차례가 온 건지도 모르겠소.'

노끈을 단단히 동여매 무기를 단단히 고정했다.
희뿌연 먼지를 털어내고는 멈췄던 다리에 다시 힘을 실어 걷는다.